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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관리연구소/시설관리 새글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시설관리 1

by by 전기돌쇠 2023. 8. 19.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세계 시설관리 1

 

 

시설 이 바닥을 한동안 떠났다.

이제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다.

 

내 다시 오지 않으리.. 지겨운 이 바닥

그동안 사놓고 몇 년이 지난 낡은 소방기사 책도 다 버렸다.

전기기사를 반드시 딸 것이라고 비싸게 산 합격한 자의 행운이 담긴 전기 기사책도 당근에 팔아 버렸다.

과년도 10년 치 프린트해 놓은 cbt 기출문제 도 전부 버렸다.

 

더러워 정말 치사하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

 

떠났다. 김기사는 속세를 초월해서 떠났다.

이제 지하의 그 쾌쾌한 냄새도 변압기의 짜증 나는 고주파음도 들리지 않으니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진행성 탈모도 멈추는 것 같았다.

이대로 더 다니다간 원펀맨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떠나야 했다.

 

풍운아처럼 산으로 갔다. 자연인처럼 살았다.

시간이 갈수록 기쁨은 커져가고 통장의 잔고는 줄었다.

곧 돈이 떨어져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가 되었다. 돈이 너무나 적었다. 모일 돈이 없었다.

모든 보험도 해지했으나 기본적으로 나가는 것만 해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김기사는 그나마 해왔던 일이 시설관리 밖에 없었다.

이제 이 무더위 다음에는 엄청난 겨울이 오고 있다.

당장의 난방비가 나갈 텐데 그러면 지출이 커진다. 게다가 자동차 오일도 갈 때가 되었는데

엔진오일 교체비 돈 13만 원이 아까워 2만 킬로까지는 타고 갈아야 할판이다.

요즘 자동차는 오일이 좋아서 1만 킬로만 타고 갈면 호구라는 말을 들었다.

당장 연말에 자동차보험료 낼 돈이 없어서 정신이 혼미하다.

 

교차로를 쳐다보고 잡코리아 워크넷을 아무리 뒤져도 나이도 먹은 40 후반 노총각에게

할만한 일이 없었다.

정육점은 좀 많이 주는데 하루종일 붉은 칼질을 할 용기도 없고 , 농수산마트에 가서 종일

과일과 감자와 쌀포대를 나르고 싱싱하지 않은 야채를 봉지에 넣어서 태그를 붙이고 정리하고 하는 일을 할 체력도 안된다.

실제로 오래전에 몸 쓰는 일을 하다가 대상포진이 온 적도 있었다.

식당에 가서 하루 10시간씩 일하면 300까지도 주지만 일주일하루 쉬고 그렇게 풀로 일할 체력도 정신도 안된다. 답이 안 보인다.

 

내가 이렇게 무능력했던가?

 

 

김기사는 얼마 전 신문을 보았다.

빵공장에서 밤에 2명이 일하다가 한 명이 기계에 말려들어가 죽은 사건을 말이다.

그뿐인가 삼복더위에 마트 카트를 정리하며 돌아다니다가 죽은 청년도 있었다.

그래 사람이 돈이 궁하면 위험하거나 하기 싫은 일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늘 위험이 따른다.

 

다시 나는 위험한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게다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핸디캡을 크게 가진 상태에서 들어가야 한다.

괴롭다 이제 죽음을 각오하고 나는 위험한 던전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

어디로 뛰어들어야 하는가?

막일은 무섭다. 체력도 안되지만 정신도 안된다.

 

조물주 다음인 건물주 아들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생각한다.

 

안 되겠다. 지금 하고 있는 알바로는 도저히 올해 말에 자동차 보험료도 못 내고 난방비도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해야 하나 하다가 경비 일자리가 나왔다.

그래서 경비일을 하려고 지원을 했다.

 

대뜸 하는 소리가 이러했다.

 

나이가 좀 너무 어리신데요...???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시면 일단 한번 와보세요.

 

그래 경비일을 하자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하고 두 개를 하면 겨우 200만 원은 되니 그나마 숨통이 트이겠지. 그래서 찾아갔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울창한 곳에 초라한 경비실이 반쯤 쓰러져가는 그런 곳이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린 검버섯이 가득 핀 팔뚝을 흔들며 어느 노인이 나오셨다.

이리 오시지요..

 

그를 따라간 곳은 역시나 지하 던전. 던전입구에는 양수기 펌프와 연결된 직경이 큰 주황색 호스가 있었다.

이번 여름에 침수가 되었었나?

 

역시 오랜만에 느껴지는 고향의 냄새가 올라온다.

눅눅한 수변전실냄새.

시설의 다크니스... 그 친숙한 쾌쾌함이 나를 반긴다.

vcb가 창백한 표정으로 서있고 알 수 없는 큐비클들이 힘없이 더위에 축 늘어져 있다.

 

그를 따라서 내려가니 방재실인지 전기실인지 오래된 소파와 책상 4개 그리고 구형 tv가 있었다.

노인축구회 사진인가 액자에 운동하는 노인들 사진이 있었다.

 

여기 앉아 계세요. 건조하고 불친절한 노인기사였다.

잠시 후 소장인지 누군지 모를 사람이 왔다.

 

호구조사를 마친 후 그는 결론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

 

아이고 너무 젊은데... 아깝네요

제가 여기 30년 넘게 있었고 자식들도 있어서...

자식 같아서 하는 말인데....

제 자식은 어디 은행에 가서 지점장 하고 잘 되었어요..

 

순간 김기사는 화가 훅 올라왔다

아니 왜 한국에 사는 시설이나 미화에서 일하는 노인들은 다 자식들이 은행이든 삼성이든 다 그런 좋은 데만 다니는 건데?

왜 우리 아버지는 나를 이런 시설관리로 뺑뺑이 돌게 하는 건데?

왜 우리 아버지 자식만 이 모양인 건데.. 아버지 못난 자식 미안합니다ㅠ.ㅠ

 

예전 지하에서 시설관리 일을 할 때 미화여사님은 청소하다가 공부하는 나를 보았다.

무슨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해요?

네 전기기사 자격을 따려고 합니다.

아 그래요?

우리 아들이 삼성 전자 다녀요. 직책도 꽤 높아요.

그리고 일하면서 무슨 기술사 자격도 땄다고 하더라고. 호호호

그거 정말 좋은 거라던데 님도 차라리 그거 따시지 그래요?

 

아니 전기기능사 간신히 따고 나서

전기산업기사도 못 따는 실력인데 무슨 기술사를 따라는 것인가?

이 양반이 나를 놀리는 것인가?

 

미화 여사님들 다들 집이 2채씩 있으시고 미화 반장님도 좋은 기업에서 평생 일해와서 아파트도 있고 산도 있고 농사지을 땅도 있고 다들 부자들이었다.

그들의 미화일은 그저 취미생활 또는 악독한 집념이었다. 있는 사람이 더 열심히 살고

남의 시선을 따지지 않는 것일까?

젊은 시절 이 어둠의 시설 세계에 들어온 나는 그들과 다른 이 세계에서 전생해 온 것이 맞다.

 

그들의 클래스와 나의 클래스는 천지 차이다.

진짜 열받는 것은... 평생 엘리트 코스로 살아오고 은행 지점장으로 엄청난 돈을 벌고 나서

호화롭고 행복하고 부족함 없이 부유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전기기능사나 보일러 자격증 하나 따고 나서 은퇴한 후에 시설관리 들어와서

이 나이 먹고 인생이모작 합니다.

4대 보험도 되고 일하는 보람도 있고 기술을 가진 전문가로 보람차게 일하고 노후가 행복합니다. 세상 다 가진 듯 웃는 사진들 그런 작위적이고 가식적인 뉴스기사를 보면 화가 났다.

한대 뒤통수를 때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니들은 가난과 지질함과 불우한 환경과 아픔 속에서 흔들리며 핀 꽃이 아니다.

젊은 시절 돈 없고 빽 없고 부모의 지원 없고 아픔과 상처 속에서 어렵게 살아온 젊은 이들의 마음을 그들은 알까?

 

김기사는 정신을 차리고 노인정 축구회 액자 사진을 한번 보고 말했다.

 

네 제가 좀 인간들에게 치이는 게 싫어서 경비일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그래도 나이도 젊은 40대에 다른 일도 많은데 왜 돈도 얼마 안 되는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혹시 결정되면 내일 연락드릴게요...

 

거기까지 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대충 마무리하고 김기사는 나왔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너무 한심하고 짜증이 나서 잡코리아에 들어가 이력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녁 내내 10군데의 지원서를 보냈다.

그것도 아파트로 말이다.

괜찮은 빌딩은 안 보이고 길 가다 보이는 게 전부 아파트이기에 아파트에 지원을 한 것이었다.

 

이제 그의 주특기였던 호 백병마 호텔, 백화점, 병원, 마트... 에 이어 새로운

이 세계인 아파트로 전생할 차례가 오고 있었다.